한국 직장인들이 유독 실수에 민감한 이유를 ‘향상 초점’과 ‘예방 초점’, 그리고 ‘상호의존적 자아’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글을 읽었다. 요약하자면, 관계를 중시하는 우리 문화(상호의존적 자아)가 ‘실수하면 안 된다’는 생각(예방 초점)을 강화시켜, 결국 도전을 꺼리고 안정을 추구하게 만든다는 이야기였다.
논리적이고,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한 설득력 있는 분석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계속 불편했다. 마치 정교하게 분석해놓은 설명서 같은데, 정작 내 현실과는 미묘하게 어긋나는 느낌이랄까. 이 글은 비판이나 반박이아니라, 그냥 쓰는 글이다.
그건 ‘성향’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글에서는 실수에 대한 두려움을 ‘예방 초점’이라는 심리적 ‘성향’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내가 매일 아침 출근해서 느끼는 감정은 과연 성향의 문제일까?
보고서의 오타 하나 때문에 팀 전체가 질책받았던 기억, 작은 실수 하나가 인사고과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뼈아픈 경험. 이런 것들이 쌓여 만들어진 나의 조심성은 ‘성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생존 전략’에 가깝다.
‘어떻게 하면 더 나아갈까?’를 고민하는 향상 초점형 인간이 부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도 성장하고 싶고, 새로운 시도를 통해 인정받고 싶다. 하지만 당장 내일의 평가와 동료들의 시선, 그리고 현실적인 책임의 무게는 ‘실수해도 괜찮아, 좋은 경험이었어’라는 말을 사치처럼 느끼게 만든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실수’ 그 자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실수가 불러올 파장, 즉 ‘실패에 대한 비난’과 ‘책임을 전가하는 조직 문화’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건 심리적 분석 이전에 지극히 현실적인 공포다.
‘문화’라는 편리한 이름 뒤에 숨은 것들
한국의 ‘상호의존적 문화’가 예방 초점을 강화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고, 관계 속에서 나를 정의하곤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문화’라는 두루뭉술한 단어로 설명하는 것은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 어쩌면 그것은 리더와 조직이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을 개인의 ‘문화적 특성’으로 돌리는 편리한 변명일 수 있다.
실수를 성장의 자양분으로 삼는 조직을 만드는 것은 리더의 역량이다. 실패의 책임을 묻기보다 원인을 분석하고 함께 해결책을 찾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회사의 몫이다. ‘우리는 원래 상호의존적이라 어쩔 수 없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더 나은 조직을 만들려는 노력을 포기하게 된다.
결국 ‘실수해도 괜찮아’라는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것은 문화 심리학자의 분석이 아니라, 내 상사의 말 한마디와 동료의 지지, 그리고 회사의 제도다. 문화 탓을 하기 전에, 우리는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리더십과 책임을 회피하는 시스템을 먼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예방 초점은 나쁜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이다
마치 ‘예방 초점’은 구시대적이고 혁신을 저해하는 나쁜 속성처럼 이야기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일의 많은 부분은 ‘예방 초점’이 반드시 필요하다. 고객과의 약속을 지키고, 정해진 예산을 넘지 않으며, 법적인 문제를 피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실수하지 않으려는’ 노력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라, 자신의 역할에 대한 ‘책임감’과 ‘프로페셔널리즘’이다.
문제는 예방이냐, 향상이냐의 이분법이 아니다. 문제는 균형이다. 책임감을 갖고 꼼꼼하게 일을 처리하되,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영역을 구분하고 그 안에서의 실패는 용인해주는 유연함이 없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예방 초점’을 가진 사람을 ‘도전을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낙인찍는 순간, 조직의 안정성을 책임지던 수많은 묵묵한 직장인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내가 실수에 민감한 것은, 단순히 내가 ‘상호의존적인 한국인’이라서가 아니었다. 나는 그저 내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고 싶었고, 실패의 고통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마음 놓고 실수하며 성장할 수 있을까?’를 함께 고민하는 조직이 이상향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 시작은 서로의 성향을 분석하고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현실적인 두려움을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