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담당자

2025. 8. 13. 13:14슬기로운 직장생활?

반응형

​오늘도 어김없이 마지막까지 사무실의 불을 밝혔다. 텅 빈 사무실, 모니터의 희미한 불빛만이 내 얼굴을 비춘다. 키보드 위에서 잠시 멈춘 손가락 끝으로 하루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밤. 문득, 스스로에게 묻고 싶어졌다. "너, 오늘 하루 괜찮았니?"

​인사(人事)는 만사(萬事)라는데, 그 만사를 다루는 내 마음은 만신창이가 될 때가 많다. 누군가는 인사업무가 사람을 상대하는 따뜻한 일일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감정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해야 하는 자리다.

​평가 시즌의 무게감

​김 대리의 얼굴이 떠오른다. 올 한 해, 누구보다 성실했지만 아쉽게도 성과가 좋지 않았다. 평가 면담을 앞두고 나는 밤새 그의 실적 데이터와 업무 기록을 뒤적였다. 객관적인 수치와 근거를 들이밀며 낮은 등급을 설명해야 하는 내 입술은 왜 이리 무거운 걸까. "회사는 학교가 아니잖아요."라는 말을 내뱉는 순간, 그의 실망한 눈빛과 마주해야 하는 건 오롯이 나의 몫이다. 그의 노력을 알기에, 그가 쏟았을 땀의 가치를 알기에, 숫자로 모든 것을 재단해야 하는 현실이 버겁다. 나는 과연 공정한 평가자였을까, 아니면 그저 냉정한 전달자였을까.

​신중한 채용,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

​수십, 수백 통의 이력서 속에서 옥석을 가려내는 일.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문제이기에 이력서의 글자 하나, 자기소개서의 문장 하나 허투루 넘길 수 없다. 며칠을 고심해 추천한 후보자가 최종 면접에서 고배를 마셨을 때, 나를 믿고 그를 추천했던 현업 부서장의 실망감과 내 안목에 대한 자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반대로 어렵게 모셔온 인재가 조직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날 때면, 마치 내 자식이 가출이라도 한 듯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버린다. 한 사람을 뽑는다는 것은 단순히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라는 이름의 공동체에 새로운 인연의 씨앗을 심는 일. 그 씨앗이 잘 자라지 못했을 때의 책임감은 온전히 내 어깨를 짓누른다.

​반갑지 않은 소식을 전해야 하는 역할

​어쩌면 인사담당자의 가장 큰 고뇌는 '반갑지 않은 소식'의 전달자가 되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모두가 환호하는 연봉 인상률을 발표하는 날보다, 일부에게만 해당되는 구조조정이나 희망퇴직을 설명해야 하는 날이 훨씬 더 많다. 회사의 입장을 대변하며 단호하게 원칙을 이야기해야 하지만, 내 앞에 앉은 동료의 막막한 표정을 보면 나도 모르게 목이 멘다.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가족사진에 시선이 닿을 때면, '나는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하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회사의 생존과 개인의 삶, 그 거대한 두 개의 가치 사이에서 나는 언제나 길을 잃는 죄인이다.

​결국엔 혼자일 수밖에 없는 자리

​인사담당자는 회사의 거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다. 누가 얼마를 받는지, 누가 곧 떠날 것인지, 누가 징계를 받았는지.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동료들과의 점심시간에 가벼운 대화거리로 올릴 수 없다. 모두와 가깝게 지내야 하지만, 그 누구와도 완벽히 가까워질 수 없는 투명한 벽. 그것이 바로 인사담당자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기쁜 일도, 슬픈 일도, 힘든 일도 혼자 삭이고 감내해야 하는 외로운 섬.

​책상 서랍을 연다. 그 안에는 차마 전달하지 못한 위로의 말, 삼켜버린 쓴소리, 그리고 애써 외면했던 나의 지친 마음이 뒤엉켜 있다.
​그래도, 내일 다시 해가 뜨면 나는 이 자리를 지킬 것이다. 힘든 순간 속에서도 새로운 동료의 설레는 첫 출근을 돕고, 누군가의 성장을 지켜보며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 분명 존재하기에. 사람 때문에 힘들지만, 결국 사람으로 인해 다시 일어서는 아이러니.

​그것이 내가 이 무거운 책상을 내일도 어김없이 마주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수고했다, 오늘의 나. 내일은 조금 더 단단해지자.

반응형

'슬기로운 직장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사인의 책상 앞  (4) 2025.08.07
능력만 있으면 될까?  (6) 2025.08.05
"네네"하다가 "네"가 사라진다.  (10) 2025.08.04
이 나이에 다시, 괜찮을까?  (3) 2025.08.04
노란봉투법?  (1) 2025.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