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2025. 7. 25. 12:43낙서같은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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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소의 '무제-90207'(1991).

 

우연히 인터넷 기사에서 이강소 화백의 그림 한 점을 마주했다. 1991년 작, '무제-90207'. 캔버스를 가득 채운 것은 정돈되지 않은 듯한 거친 붓질과 희뿌연 색감이다. 그저 거친 추상화라고 생각했다. 무언가 그려지다 만 것 같기도 하고, 혹은 무언가를 지워낸 흔적 같기도 한 그림...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 혼돈스러운 붓질 아래로 희미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같기도 하고, 새 같기도 하고, 화면 중앙에서 유유히 떠 있는 듯한 그 존재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아련하다. 하지만 분명히 그곳에 '있다'.

이내 시선은 다시 그 형체를 뒤덮고 있는 힘찬 붓질로 옮겨간다. 바람의 움직임 같기도 하고, 시간의 흐름이 남긴 상처 같기도 하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에너지의 폭발이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품어 안는 거대한 공간처럼 느껴진다. 화가의 숨결과 몸짓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살아있는 흔적이다.

그림은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다. 

텅 빈 듯하지만 모든 것이 담겨 있고, 고요한 듯하지만 격렬한 에너지가 꿈틀댄다. '텅 빈 충만함'이라는 역설적인 표현이 맞을듯,,

이 그림을 보니, 문득 나의 존재를 생각하게 된다. 나라는 존재는 무엇으로 규정되는 걸까. 나를 둘러싼 이 세상의 거친 풍파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는 어떤 흔적을 남기며 부유하고 있는 걸까. 나는 저 희미한 형체일까, 아니면 그 위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은 붓질일까.

그림은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텅 빈 캔버스 위에 남겨진 흔적을 통해 '존재' 그 자체의 순간을 보여줄 뿐. 최근에 본 그림 중에 가장 고요하지만 가장 큰 목소리로 말을 거는 그림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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