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만나다.
결국 같은 길 위에서 만나더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20대, 치열하게 미래를 그리던 시절. 세상은 두 갈래 길을 제시하는 듯했다. 푸른 작업복으로 상징되는 생산직의 길, 그리고 빳빳한 셔츠의 사무직의 길. 마치 전혀 다른 세상, 다른 인생이 펼쳐질 것처럼 우리는 그 선택지 앞에서 고민했다.
어떤 친구는 '몸은 고돼도 기술 배우고 빨리 돈 버는 게 최고'라며 공장으로 향했다. 그들에게는 '무조건, 그리고 빨리'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한 동기가 있었다. 야근과 특근으로 통장에 찍히는 숫자의 무게만큼, 젊음의 에너지를 태웠다. 그들 중 일부는 오늘의 고됨을 보상받으려는 듯, 버는 족족 유흥과 값비싼 물건에 돈을 쓰며 현재를 즐겼다. "젊을 때 고생해서 바짝 벌고 즐겨야지, 언제 또 이러겠어." 그들의 말에는 불안과 희망이 위태롭게 섞여 있었다.
또 다른 친구들은 '그래도 대학물은 먹어야지'라며 책상에 앉았다. 더 긴 시간, 더 많은 돈을 투자해 '가방끈'을 늘렸다. 몸 쓰는 일보다는 머리 쓰는 일을, 약간의 사회적 기회와 안정을 보장받을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서. 보고서와 회의의 숲에서 길을 잃고, 보이지 않는 경쟁과 스트레스에 밤잠을 설치면서도 우리는 '이게 더 나은 길'이라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렇게 십수 년이 흘렀다. 강산이 두 번쯤 변했을까. 마흔이라는 나이의 문턱을 넘어서자, 신기하게도 그렇게 달라 보였던 두 길이 희미하게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생산직 친구의 굳건해 보이던 몸은 여기저기 삐걱거린다. 허리, 무릎, 어깨... 훈장처럼 여겼던 통증은 이제 삶의 질을 갉아먹는 고질병이 되었다. 한때는 남부럽지 않던 수입도 정체되거나, 더 이상 예전처럼 몸을 갈아 넣을 체력이 없어 줄어들기 시작했다. 빨리 벌어야 한다는 강박에 쫓겨 재테크나 노후 준비에 소홀했다면, 그 불안의 무게는 더욱 무겁게 어깨를 짓누른다.
사무직 친구라고 다를까. 편해 보였던 의자는 거북목과 허리 디스크를 남겼다. 끊임없는 실적 압박과 조직 내 정치 싸움에서 오는 번아웃은 몸의 고단함과는 또 다른 종류의 깊은 피로를 안겨주었다. 안정적이라 믿었던 직장은 언제든 나를 밀어낼 수 있는 살얼음판이 되었고, 착실히 부어온 적금은 무섭게 오르는 집값과 아이들 학원비 앞에 초라해지기 일쑤다.
결국 마흔 너머의 우리에게 남은 질문은 같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자녀 학자금, 부모님 병원비, 100세 시대의 노후... 이 거대한 질문들 앞에서 우리가 20대에 어떤 유니폼을 입었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가방끈'이 길다고 해서 이 고민에서 자유로운 것도 아니었다. 좋은 직장이 조금 더 편한 길, 사회적 기회가 더 열려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그 기회라는 것도 결국은 또 다른 형태의 책임과 굴레일 때가 많았다.
인생의 전반전이 '어떤 일을 하느냐'의 경쟁이었다면, 후반전은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싸움이다. 얼마나 건강한 몸과 마음을 유지하는지, 소중한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일 외에 나를 지탱해 줄 무언가를 찾았는지.
20대의 나는 '빨리 돈을 모으지 않는' 그 친구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각자의 방식으로 젊음의 불안을 견디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정답은 없었다. 어떤 길이 우월하지도, 열등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그저 다른 풍경을 보며 같은 시간의 강을 건너왔을 뿐이다.
마흔을 넘어 쉰... 이제는 유니폼을 벗고 '나'라는 사람 자체로 인생의 후반전을 맞이해야 할 시간이다. 지난 세월의 선택을 곱씹으며 후회하기보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과 내 몸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때다.
그래,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어떤 길을 걸어왔든, 우리는 결국 같은 출발선에 다시 섰다.